#작품 노트

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. 그날 나는 취해있었고, 취하면 대체로 기분이 좋았다.
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한 조각 솜털처럼.
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 수화기를 드는 순간, 모든 것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.
얼어붙은 내 곁에서 술집 주인은 골동품이라 작동은 하지 않을 거라며 수줍어했다.



#작품 노트

그녀는 늘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. ‘괜찮다’고.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 말하며 돌아섰다.
개찰구를 내려가는 그녀의 뒤를 몇 번인가 쫓은 적도 있었는데,
결국엔 스스로 발길을 돌렸더랬다.
마치 같은 극의 자석끼리는 가까워질 수 없는 것처럼 그녀에게로 나아갈 수 없었다.



#작품 노트

의아해하는 딸 내외를 안심시키기는 했지만,
분명 조금 전 마주친 그 청년의 모습은 노인의 젊었을 적 모습과 몹시 닮아 있었다.
아니, 순간 세월을 잊고 거울을 보고 있는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.
“잠시 산책 좀 하고 오마.”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마주치지 못할 걸 알았지만,
그렇게라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.


#작품 노트

그녀가 다가가길 한참 동안이나 망설였던 건,
그에겐 이미 충분하고도 남는 이성 친구들이 존재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.
사실 말이 좋아 이성 친구지, 그의 애인 중 자신보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있기는 할까
겁부터 났다.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거리낌 없이 자신이 풀 죽은 사연까지도 털어놓았다.
그녀는 흔쾌히 사라진 그의 앵무새를 함께 찾기로 약속했다.


#작품 노트

이번만큼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.
결코 먼저 사과를 하거나, 웃지 않을 거라고 틈이 날 때마다 되뇌었다.
아니, 이대로 며칠 혼자 여행을 떠나버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.
그녀와 관련이 있는 그 누구도 이번 주말 내내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없도록.
그는 여행지를 검색할 생각에 핸드폰을 켰다.
그새 3분이 지나 점심시간까진 이제 1시간쯤 남아있었다.


#작품 노트

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이 그에게 건넨 건 포장을 뜯지 않은 새 버번 한 병이었다.
와일드 터키 101.
“늘 이 술만 드시길래 설마 했는데, 이전 사장한테 물어봐도 이 술만 드신다고 하더군요.”
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bar였다.
헐리고 카페가 들어설 거라 말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떨린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.


#작품 노트

숙소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쉽게 믿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.
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,
실제로 그 이야기는 꿈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.
지금도 그 모든 것이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.


#작품 노트

m이 손등에 키스를 할 때마다 여성들의 입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.
물론 동석한 m의 친구들 입장에선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.
한 번은 이를 두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.
하지만 m의 입장에선 결코 파트너를 뺏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.
손등에 키스를 하면 그녀들의 비밀이 보인다는 걸 어느 누가 믿겠는가.


#작품 노트

“그러니까.. 당신이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그게 다군요?”
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빛났다.
그 책이 발간된 건 벌써 6년 전이었고, 그날부터 그는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.
많은 이들이 열린 결말이라고 떠들어댔지만,
그녀에겐 분명 생각해둔 이야기의 끝이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말이다.


#작품 노트

바텐더가 그의 앞에 서서 발을 동동거렸다.
“틀진 않을 게요. 제발 어떤 곡이 듣고 싶은 건지만 알려줘요.
매번 그렇게 신중하게 골라 놓고는 신청은 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더 미치겠는 거 아냐고요.
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같은 마음이라니까.”
직원들은 물론이고 손님들마저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.